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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III







눈사람III



선배들과 함께 눈이 가득 쌓인 장태산으로 MT를 왔다.

감기 때문에 MT를 안 가려고 했지만 지난 번에 와봤던 기억이 좋아서

어머니께서 말렸지만 마스크와 여분의 외투를 챙겨서 나섰다.

이 겨울이 지나면 벌써 2학년이 되는구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문에 작년 겨울에 왔을 때는 이렇게까지 눈이 쌓이진 않았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때 난 넓은 숙소에서 남녀가 혼숙하는 것을 어색해 했고

너무나 당연하게 사람들이 여기저기 섞여서 몸을 눕히는 모습에 당황하여

저기 위에 보이는 작은 오두막에서 음악을 들으며 잠들었었다.

어쩌면 그때 얼어죽었을지도 모를 일인데,

어떤 선배 두 명이 날 찾아서 방에 데려다 놓은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술이 오가고, 뻔한 선배들의 학교생활 이야기, 어린 사랑 이야기들...

자정이 가까워지고 그것들이 지겨워지면서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밖에 나와보니 동기 아이들이 선배들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놀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방으로 들어가고,

남겨진 나는 여전히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 때 문뜩 떠올랐다.

그래, 여기서 눈사람을 만들자.



눈이 계속 내려서 눈덩이는 금방 불어났다.

조금 전 눈덩이가 지나가서 움푹 패인 눈길을

다시 와봐도 지나가지 않은 길처럼 되어있을 만큼 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으니까.

감기 때문에 기침이 나거나 하진 않았는데,

장갑을 가져오지 않아서 손이 시렸고 또 허리도 무척 아팠다.

한참을 굴리다 허리를 폈을 때 외투가 눈에 흠뻑 젖은 걸 알았고,

짧은 머리칼도 다 젖어서 앞머리 끝에는 작은 고드름들이 열린 걸 보게 됐다.

방에 들어가 여분으로 넣어온 외투로 갈아입고 수건으로 머릴 훔쳤다.

곧바로 다시 나오려고 했지만

갑자기 발바닥에 쥐가 나서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술이 쌘 걸로 유명하고 또 위협적으로 권하기도 하는 선배에게 붙잡혔다.

그가 강제한 소주 원샷은 몸을 덥혀 주어 싫지는 않았다.

사양 않고 연거퍼 두 잔을 용감하게 쏟아넣자 날 놓아 주었고,

알딸딸한 기분으로 다시 밖으로 나섰다.

또 한참 눈을 굴리다가 허리를 폈을 때 방으로 들어가던 영재형과 눈이 맞았다.

그는 내가 못쓰게 될까봐 사양했음에도 그의 가죽장갑을 내어주고 들어갔다.

그것도 금방 젖었지만 마음은 따뜻했다.



몸통으로 만든 눈덩이가 꽤 커졌을 때

서미가 소주 반 병을 원샸했다고 자랑처럼 떠들면서 나한테 다가오더니

내 눈덩이를 보고는 부수려고 했다.

그의 취한 눈에는 이 훌륭한 가능성이 심심한 안주 거리로만 보였을까?

그러다가 그도 내 옆에서 눈을 굴리기 시작했지만

곧 춥다고 들어가버렸다.

이번엔 처음 보는 누나가 우리 숙소 근처로 뛰어들어왔다.

연인인 듯한 남자가 던지는 눈덩이를 피해서

나와 눈덩이를 방패 삼아 주변을 맴돌았기 때문에

난 더 이상 굴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눈덩이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누나는 나에게 와서 존대말로 내 눈덩이를 달라고 했다.

던질 수도 들 수도 없을 만큼 커다란 것을…

당황한 나는 그 누나에게 거의 우는 소리로 그러지 말라고 소리쳤다.

눈덩이가 커져서 눈에 띄는 것이 되고서부터

굴리기 힘들만큼 무거워진 눈덩이보다 사람들의 시선이 더 부담스러웠다.

머리를 만들고 있을 때는 서미가 다시 나타나서

주접을 떨다가 도로 들어가 버렸다.

그냥 좀 내버려 뒀으면...



머리를 몸통에 얹고 시계를 보니까 새벽 네 시가 넘었다.

잠을 자야 할 것 같은데 이제서 잠들면

누군가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눈사람을 해칠 것만 같아 옆에 앉아 지키고 싶었다.

그런 고민을 하면서 눈사람에 팔을 꽂고 눈도 밖아 줬다.

아까 갈아입었던 외투와 양말은 이미 젖은 지 오래고

수건으로 훔쳤던 머리칼에는 또다시 고드름이 열렸다.

허리를 펴고 서니까 머리가 핑 돌고 어질어질 하면서 얼굴에서 열이 났다.

아, 난 감기에 걸렸었구나.



이미 숙소의 불은 모두 꺼졌다.

방안에 들어갔지만 아무렇게나 누워서 자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내 몸하나 누일 자리를 찾을 수 없었고 (더구나 깜깜해서 더욱 그랬다.)

남은 이불도 없었다. 아까 젖어서 벗어 놓았던 외투를 몸에 둘둘 감고,

젖은 양말을 벗어 맨발로 몸을 쪼그려 누웠다.

어두웠기 때문에 자는 사람들을 밟을 까봐서 들어가지 못하고

문가에 누울 수밖에 없었는데,

외풍 때문에 맨발이 너무 시려웠다.

다시 일어나 젖은 양말을 신고서

누군가의 덮은 이불에 발만 간신히 집어넣은 채로 잠들었다.



아침에 깨어서 처음 본 것은

창윤이가 눈사람의 머리를 번쩍 들어서 집어 던지는 광경이었다.

난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뭘 어떻게 해 볼 생각도 들지 않았고 그냥 굳어졌던 것 같다.

눈사람이 아침 볕에 하얗게 빛났을 텐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 던져지는 모습과

그걸 보면서 웃는 아이들을 보자니

꼭 남이 만들어놓은 눈사람이 부숴지는 걸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서미가 밤새워 눈사람 만들었대."

라고 누군가 말하는 소릴 들었고,

서미를 찾아 바라봤을 때 그는 혜은이 옆에서 그녀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던 걸까?

혹시 내가 하고싶었던,

어제 눈사람을 만드는 내내 생각했던 말을 하고 있는 걸까?

그의 입 모양이 "너 보여주고 싶어서 눈사람 만들었어."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눈사람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냥 혜은이와 눈사람 옆에 나란히 서서 사진 한 장 찍고 싶었을 뿐인데…

하지만 눈사람은 부숴졌고 그 건 서미가 만든 것이 되더라도 상관 없어졌다는 얘기다.

부숴진 눈사람을 가리키며 내가 만들었노라고 그녀에게 말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봤다.

오래 전 언젠가 느껴봤던 것 같은 초라함이 떠올랐다.

이제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어차피 녹아서 없어질 것, 그래도 부숴지는 건 너무 아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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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호부터 5일간..(오늘은 3번째 날~) 그림그리기 칼럼의 5부작 이벤트..

같은 팀 동료이신 '이홍주' 씨의

미니시리즈 '눈사람' 이 연재(?)됩니다 ^^

야옹이버스의 그림과 함께 느껴보세요..



수요일.. 한주의 중간이네요~ 여러분 이번주 잘보내고 계신가요??

^_________^